별로 중요하지 않은

누군가의 이야기

임성수

관  점  의  차  이

첫번째 이야기,

백설공주 편

: 어느 거울의 이야기

"똑 똑"

오늘도 고요한 이 방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잔잔하게 퍼져 나간다. 몇년 째 암울함만 감도는 성의 분위기, 이 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의 구석구석까지 스산한 느낌의 적막함과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간간이 성안에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가 오히려 적막감을 한층 더 짙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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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에도 어스름이 지는것 같은 노을빛만 비춰지던 이 방에도 한 때는 햇살이 비추던 때가 있었다. 언제나 싱그러운 사과의 향이 그윽하게 퍼지던 때도 있었다. 작은 소녀였던 그녀가 좋아하던 사과가 항상 방 한켠에 놓여져 있었고, 그녀는 그 사과를 항상 즐겁게 먹어치우곤 하였다. 매일매일 정성들여 이 방을 가꾸고 관리를 해주던 남자는 그 모습을 보며 참 즐거워했었지. 그는 단 하루도 잊지 않고 가장 달콤한 향이 퍼지는 사과를 가져다 놓았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흐르고 이제 이 방을 드나드는 사람은 단 한 명뿐... 그 한명으로 인해 나의 존재는 가치를 얻는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나의 여왕님. 나의 사랑스런 여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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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왕 전용 욕실의 벽 한 곳에 달려있는 거울이다. 매우 거대하고 호화로운 욕실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나의 고귀한 여왕님은 과한 사치를 좋아하지 않으신다. 이 방은 성 내의 다른 방들과 비교해볼 때 매우 아담한 편이다.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항상 들려올 정도로 작다. 쓸데없는 공간은 없다. 그녀의 몸을 씻어주고 쉬게 해주는 욕조만이 존재한다. 벽에는 그 흔한 명화도 어떤 장식도 없다. 창문 하나와 거울인 나 만이 존재한다. 목욕이 끝나면 그녀의 마법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기에 다른 그 무엇도 필요가 없다. 옷을 입혀주는 시녀도, 바닥의 물기를 닦아낼 시종도 필요가 없다. 마법이란 정말 대단한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나는 그것을 잘 안다. 이 곳에는 그저 나를 바라보며 자신의 미에 심취하는 그녀와 그런 그녀에게 심취한 나의 즐거움만 있을뿐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이 시간은 하루에 한시간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 시간의 가치는 내가 이전에 살아온 모든 삶을 비참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아름답고 완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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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성숙해진 그녀의 눈부신 나신을 보았을 때, 하마터면 나도 모르게 감탄의 소리를 낼 뻔하였다. 오랜 시간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나도 그 순간만큼은 감탄과 탄식을 내뱉고 싶은 욕구에 휩싸였었다. 신이 빚어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 온 몸 구석구석에서 고혹적인 여성성이 날 설레게 하는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몸이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얼마나 세심하게 신경을 쓰고 사랑을 가득 품고 만들었는가. 그녀는 단순히 이 세상 최고의 미인으로서 칭송받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나도 한때는 그녀를 생각하면 끓는 마음으로 아픔을 느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 그녀의 존재는 그런것들을 초월한 무언가이다. 모든 이가 합력하여 보호해야할 지고의 가치를 지닌 보물과 같다.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다. 나는 매우 오래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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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가 아직은 작고 귀여운 소녀였던 시절. 그때에도 그녀가 품고 있던 아름다움은 감출 수 없었다. 만인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였고, 그녀의 미래 모습을 기대하였다. 주위 사람들의 그런 모습이 싫지 않은 듯 미소로 화답할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그녀와 대화 한번 나눈 적 없었지만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근시안적이고 자신의 욕망에 급급한 어리석은 사내였다. 그리고 그 사내는 그녀의 결혼 발표에 격하게 슬퍼하였고 불같이 화가 치밀었다. 그녀가 누군가의 소유가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인사조차 건낼 수 없는 존재였기에, 감히 말 한마디 건낼 용기조차 없었지만 나를 집어삼킨 분노는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삶, 나의 가족, 내가 가진 모든 걸 태워서라도 나의 욕망이 바라는 대로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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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사과를 올려놓던 그 곳에 나는 어렵사리 쓴 편지를 올려두었다. 자신이 좋아하던 사과가 아닌 다른 것을 보고 실망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 표정 역시 나의 마음을 더욱 몰아세웠다. 나의 이 마음을 절실하게 적어낸 이 편지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어쩌면 나라는 존재를 이제 그녀의 마음에 담아주지 않을까? 그녀가 편지를 다 읽기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 때의 난 그 정도로 빠져있었다. 그녀와 그녀가 나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그 상황에 말이다. 결국 나는 그녀를 껴안았다. 결국 해내고 말았다. 분노인지 감격인지 알지 못할 눈물들이 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게 난 그녀를 내 품에 꼭 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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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경악하며 나를 떼어내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나의 몸이 허공에 뜨기 시작했다. 나를 향해 뒤돌아서있던 그녀는 가만히 서있었지만 파르르 떨리는 몸에서 엄청난 분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그녀로부터 어두운 기운이 퍼져나오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에 기겁하며 그저 바라보기만 할뿐, 몸을 떨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그 어두운 기운은 나의 몸을 덮었다. 곧 어지러워졌다. 세상이 괴이한 형태로 일그러졌다. 눈에 보이던 모든 것이 소용돌이치며 꼬이기 시작하였고, 어지러운 색으로 복잡하게 뒤얽혀 갔다. 내 몸의 모든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소리를 내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나를 뒤덮은 어둠과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갔고 모든 것이 굳어져 버렸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흐려져 가는 의식 저편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어떤 표정이었는지 알 수 없었음을 안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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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창고에 쳐박히게 되었고, 시간이 흘러 내가 거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 깊은 곳의 창고였던 것 같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이 공간에 들어오지 않았다. 빛조차 들지 않는 어둠과 적막 뿐이었다. 다행히도 마법에 걸리며 시간의 흐름에 대해 무뎌진 것인지 그 시간들이 괴롭지 않았다. 가끔 가족이 보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인간이었을 적의 모든 욕망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인간이었던 나는 점차 의미를 잃어가고, 그저 생각하는 거울이 되어갔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녀를 다시 한번 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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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나를 옮기는 것을 느꼈다. 누가 나를 만지는 감각도 느낄 수 없었지만 무언가에 씌워진 채 내가 어디론가 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수십년만의 변화에도 나는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많은 것이 무뎌진 거 같았다. 이윽고 나를 덮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주변을 인지하게 되자 나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감정 같은 것은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예전의 기억을 바로 떠오르게 하였다. 다소 어둡고 스산한 기분이 드는 곳이었지만 내가 일하던 그곳, 그녀의 욕실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방에 들어왔다. 소녀에서 여왕이 되었지만 난 그녀라는 것을 알았다.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그녀였지만, 이제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녀와의 시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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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그녀는 나와 함께 있는 이 공간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 있는지 난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마음 아파하고 있다는 것은 나밖에 모르겠지. 차갑고 두려움을 자아내는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도 내 앞에 선 후엔 얼굴에 슬픔을 가득 띄운다. 어떤 날은 욕조에 몸을 뉘운 채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아무 감각도 없는 나지만 그녀의 그런 모습은 나에게도 슬픔을 주었고, 분노의 편린 같은 감정을 어렴풋이 느끼게 해주었다. 그때 그 운명의 날에도 슬픔과 분노에 가득차 있었고, 지금도 그러한 것들을 느낀다. 어쩐지 그녀의 감정에 공명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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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째선지 그녀가 오질 않는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갑자기 성이 요동친다. 모든 것이 격하게 흔들린다. 거울의 시야가 흐려져갔다. 그때 그 날처럼 모든 것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거울은 문득 손에 감각이 돌아오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발가락에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감각이 사라져가던 그때와는 반대로 조금씩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이었다. 거울은 다시 그 남자로 돌아왔다. 그녀의 마법이 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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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을 차린 사내는 급하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성안의 어둠이 걷혀가고 있었다. 어둠이 걷혀 가는 반대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성의 중심인 홀을 향해 정말 온 힘을 다해 뛰어갔다. 사내는 신발도 옷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아 보였다. 정말 온 힘을 다해 내달렸고,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사내는 자신의 여왕이 가슴에 칼이 박힌 채 죽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거대한 칼은 그녀의 심장을 관통해 바닥까지 박혀있었다. 아름다운 여왕이 분명 자신의 명을 다해있었음을 사내는 바로 깨달았다. 여왕의 처참한 모습을 발견한 사내는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주저앉고 오열하였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말을 반복하며 엎드려 바닥을 내리쳤다. 수십년 만에 성안에 햇살이 들기 시작하였지만, 그 햇살조차 사내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 못하였다. 차갑게 식어가는 여왕의 주검 옆에 서있는 아리따운 한쌍의 남녀는 그런 사내의 모습을 보며 기쁨에 겨운 듯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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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 드디어 해냈군요! 근데 저 분은...?"

"아마 여왕의 마법에서 풀려난 사람 중 하나가

  아닐까요?"

"아 정말 다행이네요. 저렇게 울면서 기뻐하다니,

  저도 울음이 나올 것 같아요."

"백설공주, 저 사람도 우리도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군요."

"네 맞아요!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왕국을

  만들어가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나의 백설공주."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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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이야기,

신데렐라 편

: 어느 귀족의 이야기

푸른 초원 위로 한 줄기 길 위로 달려가는 마차 안. 오늘처럼 특별한 날에 어울리는 정말 상쾌한 햇살이 마차 안에도 내려쬔다. 경호원 둘과 나, 이렇게 남정네 셋이 침묵을 지킨 채 달리는 마차 안이지만 초원의 싱그러운 봄의 향이 코를 간지럽힌다. 열린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 가끔 눈을 감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멋진 여행을 만끽하는 즐거움이 더 날 들뜨게 한다. 오늘 일이 잘 풀리기만 한다면 더없이 멋진 하루가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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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늘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온 만큼 더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수 없다. 괜찮을 것이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진행될 것이다. 지난 며칠 동안 계속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아 왔다. 오늘은 내 삶에서 가장 큰 도박을 하는 날이다. 오늘은 내가 태어난 이유가 되는 날이 될 것이다. 오늘은 오랫동안 왕가에 충성을 다해온 우리 가문과 이 나라의 밝은 미래를 위한 큰 도약의 날이 될 것이다. 이제까지 준비하고 진행해온 일은 완벽하였다. 이제 마지막, 이번에 방문하는 곳에서 아무 일이 없다면 그 이후론 모두 계획대로다. 날씨마저 나의 계획을 응원하는 것 같다. 대자연이 빚은 저 아름다운 광경을 몸소 느끼고 감사하게 된다. 하찮은 마법따위로는 감히 흉내낼 수도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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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계획의 시작은 그 무도회의 밤이었다. 솔직히 그녀가 이 회장에 처음 들어왔을 땐 나도 놀랄수 밖에 없었다. 나의 사랑스러운 동생 마리아를 제외하고 그렇게 아름다운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발그레한 홍조를 띄운 뺨, 그리고 그 보드라운 두뺨 사이에 떠오르는 미소가 무도회장의 모든 남자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음이 틀림없다. 여성 편력이 있는 나조차 그녀에게 춤을 청하고 싶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녀가 입은 드레스는 대단히 기품이 넘치는 것이었기에 그 빼어난 미모를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어 주었다. 어지간히 위세있는 가문이 아니고서야 저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드레스를 준비할 수 있을리 없다고 다들 생각했을 것이다. 회장의 모든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서기위해 서로 눈치를 보는 상황에서, 당당히 먼저 다가선 건 역시나 잘나신 왕자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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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가 절정에 이르는 열두시 무렵, 나는 바람이나 쐴 겸 발코니에 나와 있었다. 어찌보면 운명같은 타이밍이었다.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녀가, 나의 주군이긴 하나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마음에 썩 좋지 않았다.

달빛이 유난히 성을 비추는 가운데 열두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하였다. 이제 무도회도 끝이 나겠지. 그런데 그때 정문을 급히 나서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계단을 급히 내려가는 그녀, 그리고 그런 그녀를 쫓는 왕자. 마치 자신을 해하려는 이로부터 벗어나려듯 급하게 성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구두를 많이 신어보지 않았던 것인지 뛰는 모습도 어색하였고, 결국 구두 한쪽이 벗겨져 버렸다. 신비로웠던 그녀는 덩그러이 남은 구두를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성의 바깥을 향해 내달렸다. 사려 깊은 왕자는 그녀를 배려해서인지 더이상 쫓지 않고 구두를 집어 들었다. 나는 다시 눈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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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시 종이 끝날 무렵 그녀는 거의 성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마지막 종이 울리자마자 그녀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시선을 뗄 수 없었던 드레스를 자랑하던 아름다운 그녀는 사라지고 허름한 누더기 옷을 입은 여자 하나만이 그곳에 남아있었다.

마법이었다. 저 요망한 마녀의 마법에 나를 포함하여 성에 있던 모든 남자가 홀렸던 것이다. 식은 땀이 흐르고, 이런 속임수에 넘어간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마법을 사용해 괘씸하게 사기를 치고 많은 이를 농간한 그 마녀는, 자신의 행색을 돌아보더니 그대로 달아나 버렸다. 그때 어떻게든 그 마녀를 추적해서 엄벌에 쳐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내가 온 나라를 돌아다니고 있지 않을텐데 말이다. 아니지, 그랬기에 난 새로운 기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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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 다음 날, 온 나라에 말도 안되는 명령이 선포되었다.

"유리 구두의 주인을 찾아라. 왕자를 그녀와 결혼하게 할 것이다."

경악스러웠다. 나만이 그 마녀의 진실을 알고 있기에 두려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성의 모든 귀족들이 그녀에게 매료되어 있었고, 이 결혼을 축복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목격한 것을 말한다 한들 아마 나만 그녀를 모욕한 죄로 눈밖에 나버리겠지.

"이 유리 구두를 들고 그 여성을 찾을 사람이 없는가?"

아무도 먼저 나서지 않았다. 왕자 자신이 돌아다니면 될 일이지만 왕족 체면에 그럴 수는 없는 것이겠지. 고행이 따로 없다. 그 여성을 찾기까지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여성들에게 신발을 신어보게 만들어야 한다. 얼마나 걸릴지, 얼마나 힘들지 모두 알고 있기에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게다가 유리구두가 깨지기라도 하면 즉결 사형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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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전혀 다른 아이디어가 내 머리를 스쳤다.

"제가 그 영광스런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날 바라보았다. 나라의 존망이 걸린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내가 나서야 했다. 이 아이디어만이 모두를 구할 것이다. 더불어 우리 가문에 일생일대의 기회를 줄 것이다. 왕가 다음으로 존경을 받던 가문의 사람인 내가 나선다 하니 모두가 환영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여행, 그리고 나의 계획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계획은 사랑하는 나의 여동생을 왕족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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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나의 마리아. 귀엽고 사랑스러운 나의 하나뿐인 여동생 마리아. 나는 미래에 그녀가 왕자의 반려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빼어난 용모 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랑을 듬뿍 받은만큼 주변에 기쁨을 퍼뜨리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자라났다. 고운 성품에 어울리는 지식과 교양을 갖추었고, 아랫 사람에게도 존중을 가지고 대하는, 정말 오빠인 내가 존중할 만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 가문의 자랑이며, 나에게는 왕가로 통하는 다리 같은 존재. 누구나 마리아가 왕비가 될 것이라 말하였다. 자랑을 자제하는 나조차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로 밤을 지새울 정도로, 그녀가 바로 이 나라의 미래임을 말하였다. 이 나라를 사랑해마지 않는 나에게 마리아만큼 왕가의 반려자로서 적합한 이가 없었다. 마리아와 함께 통치를 한다면 분명 이 나라의 모든 이가 행복해질 것이라 확신하였다. 하지만 이제 그 미래는 사라지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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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비밀스럽게 실력있는 기술자를 찾아 그에게 유리구두를 한쌍 만들게 하였다. 나의 여동생의 발 사이즈에 딱 맞게 말이다. 그리고 적당한 순간이 왔을 때 구두를 내가 만든 것으로 바꾸고, 나는 마리아에게 달려가 구두를 신게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마리아는 나이가 어려 이제까지 무도회에 한번도 참여한 적이 없기에 불필요한 의심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미 마리아가 그 여성이었다는 것이 밝혀진 후에 공표할 시나리오도 준비되어 있다. 일단 그녀가 마리아라고 발표만 하면 된다. 그 이후는 어떻게든 될 것이다.

마리아의 발에 딱 맞는 유리 구두를 만들기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했기에, 나는 구두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길 바라며 임무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구두가 완성이 되어 내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 이번 방문지를 거쳐 다음 방문지가 우리 가문의 저택이다. 그곳으로 이동하는 중간에 바꿔치기하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 마녀에게 이 나라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정말 마법따위 너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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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소에 도착한 마차 앞에는 이미 구두를 신을 여성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녀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이는 일단 눈에 띄지 않았다. 안심이 되었다. 마차에서 내려 여성들에게 한번씩 구두를 신게 만들어 보았다. 비슷하게 신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정도는 나타날만도 한데, 마법의 힘인지 여태까지 어째 맞는 이가 한명도 없었다. 나에겐 정말 큰 다행이었다. 수많은 여자들이 구두를 신어보았고, 결국 아무도 구두에 맞지 않았다. 구두의 주인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속으로 쾌거를 외쳤다. 이제 빨리 이곳을 떠나면 된다. 마리아가 기다리는 나의 집으로 빨리 떠나야 한다. 이미 구두도 약속 장소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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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너, 아직 안 신었지? 이리 와."

여행 중에 말 한마디 없던 무뚝뚝한 경호원이 처음으로 입을 떼었다. '쯧' 난 속으로 혀를 찼다. 경호원 주제에 왜 쓸데없이 나서는 건지. 짜증이 확 밀려왔다. 경호원의 부름을 받고 온 소녀는 어딘가의 시녀처럼 보였다. 아니 그보다 더 허름하고 께름칙한 얼굴이었다. 재가 잔뜩 얼굴에 묻어 있었다. 재투성이가 따로 없었다.

"빨리 신겨보고 어서 다음 목적지로 갑시다. 갈 길이 멀군요."

솟아오르는 짜증을 참고 정중하게 말하였다. 이제 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하니 이런 사소한 시간 낭비조차 아까워졌다. 이제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될 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가,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짜증이 나서 재투성이 여자를 다시 바라보았다. '어째선지 낯이 익은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구두를 신으려 하고 있었다. 불현듯 그 마녀가 입고 있던 옷이 기억에 스쳐지나가고 재투성이의 옷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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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아니 잠깐!"

"안돼 !!"

 

 

 

"그녀다!"

"신발의 주인을 찾았다!"

"드디어 딱 맞는 사람을 찾았어! 만세!"

"나으리, 이 소식을 어서 성에 알려야죠!"

"축하드립니다."

 

"아름다운 여성이시여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저는... 신데렐라 라고 해요."

"신데렐라 만세! 신데렐라의 앞길을 축복합니다."

"이 나라의 앞날에 영광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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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노와 경악의 표정을 하고 있는 세명의 여성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이 기쁨에 겨워하고 있다. 저들도 저 마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일까...? 저 마녀가 결국 해내고 말았다.

오, 신이시여, 이 나라를 불쌍히 여기시고, 저 사악한 마녀의 농간으로부터 지켜주시옵소서.

 

난 마법이 너무 싫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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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이야기,

잔잔하게 파도가 내려치는 어느 한 해변. 뜨거운 햇볕이 내려쬐는 모래들 위로 파도가 쉼없이 오르내린다. 황금빛 모래가 펼쳐져있는 해변에는, 파도에 닳고 닳은 자갈들만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오늘처럼 배의 나무 파편들과 사람들이 해변에 떠밀려온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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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변에 떠 밀려온 사람은 두명이었다. 한 남자와 한 소년. 따사로운 햇살과 점점 밀려들어오는 파도에 먼저 깨어난 것은 남자였다. 자신의 상황이 이해가 안가는 듯 아무런 미동도 안하던 남자는 벌떡 일어나 소리지르기 시작하였다.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금새 이해하고나서야 남자의 눈에 소년이 들어왔다. 남자는 소년에게 헐레벌떡 다가갔다. 급한 마음에 헛걸음 짚고 넘어지며 바닷물과 모래에 얼굴을 쳐박았다. 눈에 이물질이라도 들어간듯 고통스러움을 느끼며 눈을 닦아내고 눈물을 흘리며 남자는 소년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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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소년의 이름을 외쳤다. 남자는 소년의 가슴에 귀를 대보았다. 파도소리 속에서도 소년의 심장이 희미하게나마 요동치는 소리가 들렸다. 미약하지만 소년은 숨도 쉬고 있었다. 안도로 인한 기쁨인지 남자의 눈에서는 아까보다 더 많은 눈물이 나왔다. 소년을 깨우고자 계속 소년의 이름을, 아들이라 부르며 부둥켜 안고 울었다. 그때였다. 한무리의 소년들이 남자의 앞에 나타났다. 괴상하고 다양한 옷을 입은 12살 내외로 보이는 소년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다가서는 그들을 향해 남자는 도와달라고 외쳤다.

 

"뭐야, 어른이 있네?"

"어떡할까?"

"아이는 살아있는 거 같아."

"좋았어! 새로운 가족이 생기겠는걸!?"

"일단 이 친구를 어른으로부터 떼어놓자."

"그래 일단 먼저 구출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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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소년들이 하는 이야기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가족? 아들의 유일한 가족은 나뿐인데? 구출하다니? 무슨 말인지 혼란에 빠져 그저 바라보기만 하던 순간, 녹색옷을 입은 한 소년이 아들을 품에서 재빠르게 앗아가 버렸다. 아들을 품에서 놓치자마자 뒤에서 갑자기 발길질이 날아와 남자를 앞으로 쓰러뜨렸다. 다시 한번 남자의 눈, 코, 입에 바닷물이 들어갔다. 일어서서 정신을 차리고 소년들을 향해 눈을 돌렸다. 소년들은 이미 해변을 벗어나 숲에 들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빠르게 일어나 그들을 뒤쫓았다. 맨발에 조깨 껍질이 밟혀 통증을 느꼈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납치당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구해야한다는 마음만 간절하였다. 하지만 맨발로 숲을 달리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온 힘을 다해 뛰었지만 이내 소년들은 남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자는 아까보다 더 크게 울부짖었다. 남자는 하나뿐인 가족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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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번째 이야기,

피터팬 편

_어느 해적의 이야기

그 이후 어떻게 시간이 흘러갔는지 남자는 기억하지 못했다. 남자는 다시 해변으로 돌아와 배의 잔해들을 뒤졌다. 쓸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식량으로 쓸만한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하염없이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꼬박 하룻동안을 걸은 후에야 남자는 왁자지껄한 항구 마을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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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도움을 청했다. 만나는 이마다 자신의 사연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고 자신의 아들을 찾도록 도움을 요청하였다. 몇몇은 처음 보는 낯선 이의 방문에 주시하기도 하였지만, 볼품없는 부랑자 같은 그의 행색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시끄럽게 울부짖는 그에게 발길질을 날리는 이도 더러 있었다. 그 누구도 남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점차 남자의 마음에 증오가 차오르기 시작하였다. 미친 놈처럼 웃으며 자신의 아들을 앗아간 소년을 저주하였다. 녹색 옷을 입었던 소년에 대한 저주를 퍼부었다. 주위에서 미친놈처럼 바라보았지만 남자는 개의치않고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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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코 미친 남자를 바라보던 이가 있었다. 주변의 다른 인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화려하고 아름다운 제복을 입고 있던 그 남자는 멋지게 말린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그에게 다가섰다. 그가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이윽고 제복을 입은 남자가 울부짖는 남자에게 다가갔을 무렵, 그 시끄러웠던 마을에는 남자의 외침만이 울려퍼졌다. 제복을 입은 남자는 그에게 다가가 자신의 갈고리로 그의 얼굴을 들고 자신을 후크 선장이라 말하였다. 그리고 남자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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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크는 녹색 옷을 입은 소년에 대해 저주를 퍼붓는 이 남자가 마음에 들었다. 항상 자신을 골탕먹이는 존재에 대해 나날이 적대감은 높아져 갔지만, 왠지 자신의 부하들은 점점 의욕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대충대충 싸우다 대충대충 후퇴하는 일들이 늘어만 갔다. 그런 와중에 이런 강렬한 적개심을 가진 사람이 떡하니 나타나다니.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고 생각하였다. 이 증오를 이용하여 그 가증스러운 피터팬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후크는 남자를 자신의 배로 초대하여 남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자신의 부하들을 모아놓고 눈물을 흘려가며 풀어내었다. 소중한 가족을 빼앗긴 이의 슬픔을 전하였다. 하나 뿐인 아이를 잃은 아비의 분노를 말하였다. 엉망진창으로 살아가고, 타인을 해하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온 그들이었지만, 아이를 잃은 아비의 마음에 동조하게 되었다. 순식간에 그들은 정의가 되었다. 가족을 빼앗아간 대악당 피터팬을 처단할 것을 외쳤다. 하지만 그것은 그 때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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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해적이 된지 한달이 지났다. 남자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피터팬의 근거지를 찾아 헤메었다. 영악한 꼬마들을 찾고자 숲을 헤메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득도 올리지 못하였다.

세달이 지났다. 그 소년 무리와 한번의 조우가 있었지만, 금방 사라져버렸다. 단 한번 뿐이었던 기회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였다.

1년이 지났다. 자식을 잃은 슬픔은 많이 잊혀졌지만, 분노는 조금도 사그러들지 않았다. 매일매일 숲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가증스러운 피터팬 놈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과는 달리 이젠 아무런 의욕없이 함께 나서는 동료들 때문인 것 같았다. 언제부턴가 남자는 혼자 수색에 나서곤 하였다. 발이 느리고 멍청한 해적 놈들과 함께 있으면 자신마저 저 무기력한 분위기에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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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이 지났다. 이미 자신 외엔 아무도 남자의 아들을 신경쓰지 않았다. 처음엔 격려해주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후크 선장 역시 관심을 잃은지 오래였다. 남자는 3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자신이 조금도 늙지 않는 것을 알았다. 네버랜드에서는 아무도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신비로운 기분이었다. 아마 이것 때문에 다들 시간의 흐름에 무감각한 것 같았다. 3년 동안이나 아이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동료들에게 말해도 아무도 그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의 동료들을 이렇게 나태하게 만드는 요인이 이것이라 생각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자신의 아이를 되찾기만 한다면, 아들과의 잃어버린 시간을 복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안도하였다. 10년, 100년, 언젠가는 그 아이를 찾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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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남자는 오늘도 숲으로 나섰다. 간악한 피터팬 무리를 빨리 잡는다면, 매일 이렇게 고생할 것도 없이 스미랑 술을 퍼마실 수 있을텐데 말이다. 스미 녀석, 가끔 과거 얘기를 나누고는 하지만 서로 할 이야기들이 많지 않다. 기억에 남는 거라곤 서로 매일 얼굴 보고 술잔을 기울이는 것 말고는 기억에 남질 않으니 말이다. 남자는 점차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오늘도 허탕이다. 숲에서 돌아와 보니 후크 선장이 새로운 아이들을 잡아왔다. 귀엽게 생긴 아이들이었지만, 이내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나이를 불문하고 그냥 아이들이 싫었다. 빨리 바다에 빠뜨려 악어밥으로 만들어버렸으면 좋겠다. 간악한 피터팬의 무리들 때문에 이만저만 고생하고 있는게 아니다. 그 자식들만 없어도 후크 선장이 닦달하며 남자와 동료들을 괴롭히는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드디어 잡아온 아이들에 대한 처형식이 시작되려한다. 후후 가증스런 저 아이들이 악어밥이 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훌륭한 안주거리였다. 그때였다. 그 썩을 피터팬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개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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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팬이 배에 올라 아이들을 구하자마자 다른 꼬맹이들이 배에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남자는 소년들을 향해 칼을 치켜세우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남자는 오늘이야말로 이 꼬맹이들을 다 쓸어버리고 피터팬의 목을 따버리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도 잠시, 남자의 앞을 한 소년이 가로막았다. 순간 기분이 불쾌해졌지만, 한편으로 꼬맹이 하나 줄일 생각을 하니 기분이 달아올랐다. 수차례 칼을 맞대었지만 승부는 쉽게 나지 않았다. 승부가 점차 길어질수록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소년의 눈을 보게 되었고, 문득 남자는 그리운 기분이 들기 시작하였다. 다른 꼬맹이들과는 달리 어쩐지 이 녀석은 싫지 않았다. 이 승부에 이기더라도 이 녀석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와 이렇게 오래도록 칼을 맞대는 것이 오랜만이라 그런것인지, 이 싸움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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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이 물에 빠졌다."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려왔다. 맙소사, 후크 선장이 아무래도 피터팬에게 패한 것 같다. 모든 해적들이 싸움을 그만두고 선장을 구하려고 뛰어들거나 배 위에서 떨 뿐이었다. 선장의 안위에 신경을 쓰는 사이, 자신과 싸우던 소년이 어느샌가 사라져 있었다. 선장을 물에 빠뜨린 피터팬 놈은 유유히 아이들을 품에 안고 날아가고 있었고, 다른 소년들은 모두 신나게 소리치며 숲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는 난리통 속에서도 남자는 숲으로 돌아가는 소년들 사이로 아까의 그 소년을 보았다. 어쩐지 또 한번 그립고 슬픈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스미랑 술이나 마셔야 겠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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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이야기,

피터팬 편

_어느 아이의 이야기

나무로 만들어진 방 안에서 아이는 눈을 떴다. 다소 어두운 공간이지만 창을 통해 스며드는 햇살이 따스하게 방안을 비춘다. 나무로 만들어져서인지 다소 축축한 공기가 소년을 엄습했다. 방안엔 특별히 눈에 띄는 가구는 없었지만 아이의 것들처럼 보이는 장난감과 작은 옷장, 그리고 작은 침대들이 늘어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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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이제 막 눈을 뜬 아이의 옆에 작은 꼬마가 서있었다. 여섯살 남짓으로 보이는 어린 꼬마는 가슴팍에 토끼 인형을 꼭 안은 채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팬 ! 일어났어 !"

갑자기 문이 쾅 하고 열리고 훤칠하게 잘 생긴 소년과 다른 아이들이 우르르 들어오기 시작했다. 키가 컸고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팬 이라고 불리우는 소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상하의 모두 녹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어쩐지 날아다니는 것 같은 가벼운 몸짓으로 아이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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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이제 막 깨어난 아이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이곳은 네버랜드라는 섬이며, 나이를 먹지 않는 환상의 장소라 설명하였다. 원래는 쉽사리 들어올 수 없는 곳이지만 우연히도 해안에 떠밀려온 아이를 자신들이 구조하였다고 하였다. 아이는 다른 사람들이 없었냐고 물었지만 혼자 였다는 슬픈 답변만 돌아왔다. 가족을 잃은 아이는 금새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고, 소년은 그런 아이를 말없이 안고 위로해주었다. 다른 아이들 역시 말없이 둘러서서 그들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소년은 아이에게 자신이 새로운 가족이 되어 지켜줄 것이라 위로하며 꼭 안아주었다. 어쩐지 아이는 소년의 품안에서 슬픔이 금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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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깨어나고 며칠 동안은 팅커벨이라는 요정과 함께 집과 주변을 돌아다니며 네버랜드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높은 곳에 올라 섬의 전경을 구경하기도 하고, 인디언과 해적과 같은 네버랜드의 다른 사람들에 대해 배우기도 하였다. 어느 날엔 피터팬이 끼어들어 어른이 되지 않는 네버랜드의 좋은 점에 대해 듬뿍 설명하며, 어른은 나쁜 사람 밖에 없다며 어른이 되면 자신의 가족이라 하더라도 처단할 거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하였다. 나쁜 어른의 대표적 유형으로서 해적들을 설명하였고, 해적들의 마을에 가까이 가지 말것을 경고하였다. 하늘을 나는 소년, 요정, 나이를 먹지 않는 섬, 그리고 해적까지... 아이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비로웠다. 그리고 피터팬이 함께 있으면 언제나 기분이 즐거워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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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른 후 아이도 이제 완전히 피터팬 패밀리의 하나가 되었다. 매일 다른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놀면서 하루 하루를 보냈다. 비슷비슷하면서도 왠지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은 전혀 지겹지가 않았다. 언제나 모험할 대상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가아끔은 악당 해적들을 골탕먹이는 즐거움도 있었다. 때때로 피터팬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훈련을 받기도 하였는데, 힘들긴 해도 멋지게 칼싸움을 하는 팬에 대한 동경심으로 열심히 연습하였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팬 다음가는 칼싸움 실력을 갖게 되었다. 팅커벨과도 많이 친해져서 가아끔은 요정 가루를 몸에 뿌리고 팬과 함께 날아다니기도 하였다. 네버랜드에서의 삶은 너무나 즐거웠고, 점점 이 섬에 오기 전의 삶에 대한 기억은 흐려져갔다. 자신을 사랑해주던 부모님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이 날 때도 있었지만, 딱히 슬픈 감정이나 그리움같은 것이 떠오르진 않았다. 그냥 그런 것에 점점 무감각해져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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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네버랜드에 온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까? 나이를 먹지 않으니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해 둔감하다보니 그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었다. 평소와 다름 없는 하루를 시작하려는 어느날 아침, 시끄러운 소리에 아이는 잠에서 깼다. 총소리 같은 것이 나던 것도 잠시, 팬이 다른 아이 세명과 함께 돌아왔다. 뭔가 다들 아침부터 분주꼬마 두명과 어여쁜 소녀를 데리고 온 팬은 그 소녀를 우리의 엄마라고 소개하였다. 엄마라고 하기엔 너무나 어린 소녀였지만, 매우 아름답고, 어쩐지 성숙한 느낌이 들어서 안기고 싶은 기분이 들게 하였다. 팅커벨과 팬이 다투더니 팅커벨이 쫓겨나버렸지만, 대신 소녀가 있으니 아무래도 좋은 기분이었다. 새로운 가족과의 새로운 삶에 대해 아이는 기대가 차올랐다.

| 6

새로운 식구가 들어온 후, 새로운 모험과 파티를 즐기던 것도 잠시, 해적 후크 선장이 웬디와 다른 아이들을 납치해버렸다. 드디어 해적들과 결판을 치룰 때가 다가왔다. 그동안 익힌 칼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할 날이 되었다. 팬이 먼저 돌격하고 이윽고 아이들은 함께 따라서서 다른 아이들을 구출하고 해적들과의 싸움을 시작하였다. 팬으로부터 칼싸움을 배운 아이에게 대적할만한 해적은 많지 않았다. 해적을 하나 둘 바닥에 쳐박거나 바다에 빠뜨리며 아이는 신나는 스릴감과 즐거움을 느꼈다. 그 어떤 해적도 자신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에 도취되었다. 팬이 후크를 상대하는 동안 최대한 많은 해적들을 쓸어버려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아이의 눈에 한 해적이 들어왔다. 다른 해적들과는 달리 분노와 증오를 가득 담은 무시무시한 눈이었다. 그 해적은 곧장 팬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이는 그 해적의 앞을 가로 막았다.

| 6

둘의 싸움은 매우 치열하였다. 그 해적은 피터에게 다가서고자 하는 자신의 앞을 방해하는 아이를 향해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다. 싸움 실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는 이 해적과 딱히 만난 기억이 별로 없는데 어쩐지 낯익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 제대로 실력이 나오지 않는 듯하였다. 빨리 이 해적을 떨쳐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동시에 왠지 이 해적과 좀 더 오래 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흉악하고 재수없는 다른 해적들처럼 술냄새와 악취가 진동하고, 더러운 꼴을 하고 있는 해적이었건만, 그렇게 싫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왠지 모를 안쓰러움도 느껴졌다. 아이는 자신의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감정에 점차 혼란을 느꼈다. 점점 아이의 칼놀림이 무뎌져 가는 것 같았다. 이대론 위험하겠다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이 싸움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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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이 물에 빠졌다!"

어디선가 큰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와 싸우던 해적은 아이로부터 눈을 떼고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와 동시에 팬이 아이의 손을 잡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이겼다며 좋아하는 무리와 함께 해적선을 떠나면서도 아이는 그 해적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 해적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듯 하였다. 아이의 마음에 잠시 그 해적에 대한 그리움과 어쩐지 조금은 슬픈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괜찮아졌다. 팬과 함께 있으면 항상 그랬다. 하늘을 날기 위해선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고 하는데, 아마 그런 것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팬이 웬디와 동생들을 그들의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온 날 저녁, 새로운 식구였던 웬디네가 사라져 조금 우울하였지만, 해적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기념으로 파티를 열었다. 파티가 즐거워질수록 낮에 만났던 해적에 대한 생각과 웬디가 떠난 슬픔이 사라져가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졌다. 갑자기 팬이 벌떡 일어나 아이들에게 소리치기 시작하였다.

| 8

"오늘 모두 멋있었어! 그 나쁜 해적들을 우리가 혼내주었다고! 후크 선장이 도망치는 거 모두 봤지!? 진짜 웃겼는데 말야. 잠시 우리의 엄마가 되주었던 웬디는 결국 우리를 떠나고 말았어. 참 아쉽고 슬픈 일이야. 하지만 우리에게 새로운 가족의 필요성을 알게 해준 나날이었어. 모두 새로운 가족과 더 즐겁지 않았니!? 그래서 말이야, 앞으로 더 열심히 다른 친구들을 데려오고자 해! 어른들이 필요없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친구들을 잔뜩 데려와서 함께 더 즐겁게 네버랜드에서 놀고 싶지 않니!?"

"맞아! 새로운 가족들과 함께 새로운 모험을 떠나고 싶어!"

"나두 동생을 갖고 싶어..."

"난 엄마 말고 누나!"

"우리처럼 쌍둥이가 또 있으면 좋겠어."

| 9

"걱정마! 이제는 우리의 친구가 된 아이를 어른의 손아귀로부터 구해냈던 것처럼, 더 많은 친구들을 어른들로부터 네버랜드로 데려오겠어! 앞으로 얼마나 더 즐거워질지 정말 기대되는걸!? 내일부터 오게 될 친구들을 위해 새로운 집을 짓고 새로운 놀이터를 만들자. 더 많은 이들을 위한 식탁과 침대들을 함께 만들자.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자!"

모두가 열렬히 환호했다. 아이도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다. 환호를 외쳤다. 너무 좋아서일까, 아이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어쩐지 아이의 마음에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들었지만, 아무도 그런 기분을 알지 못하게 열심히 소리쳤다. 하지만 어른의 손아귀로부터 구해냈다는 말을 할 때 자신을 가리켰던 팬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점점 무서워졌다. 팬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땀이 흘렀다. 아... 웬디가 떠날 때 같이 떠날걸... 조금 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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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이야기,

미녀와 야수 편

_어느 사채업자의 이야기

소복히 눈이 내려앉은 곳에 점점 밤그늘이 짙게 깔려가는 시간. 외딴 시골에 자리잡은 마을의 저녁이 소란스럽다. 평소라면 도란도란 가족들과 둘러앉아 저녁을 함께 하고 아이들은 하나둘씩 잠에 들 시간이지만, 마을 광장에 다함께 모여 한 마차를 둘러싸고 있다. 사채업자 역시 그렇게 모인 사람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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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 건 아마 저 개스톤이라는 청년 때문이 틀림없다.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또렷하며, 남성미를 물씬 풍기는 저 남자는 마을 처녀들뿐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청년이다. 다소 가볍고 건달배같은 모습을 종종 보이긴 하지만 특유의 넉살 때문에 다들 저 남자를 좋아한다. 사채업자 역시 싫어하지 않는 청년이다. 돈을 빌려가도 떼먹지 않고 잘 돌려주는, 나름 착실한 녀석이다. 그리고 그 남자가 지금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리스라는 한 노인을 정신병원으로 보내려 하고 있다. 자신을 모함하고,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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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네는 야수가 자신의 딸을 납치했다느니, 마법을 보았다고 주장하였으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게다가 개스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였다니... 절실하게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 외치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헛소리일 뿐이었다. 적어도 사채업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는 그랬다. 오직 사채업자만이 그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마법... 마법이라면 자신이 겪고 있는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채업자는 마법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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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업자는 변방의 이 마을에서 사채업을 하며 자신의 재산을 키워왔다. 그다지 풍요로운 마을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으며 적당히 풍족한 생활을 해왔다. 마을 사람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대도시의 사채업자에 비하면 양심적이고 과하지 않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마을이 작지 않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객들에 대해선 얼추 다 기억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물론 따로 장부를 적어두는 절차를 생략하지 않는 꼼꼼한 면도 있었다. 웬만해선 기억과 장부가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그런 일은 있어선 안되는 것이었다.

| 4

처음 사채업자가 이변을 발견한 것은 몇년 전이었다. 어느 때와 다름없는 주말의 늦은 저녁, 일주일을 마무리하며 장부를 정리하고, 자신의 재산과 고객과의 거래 내역, 앞으로 받아야 할 돈들을 정리하는 것이 사채업자의 취미이자 낙이었다. 조금씩이지만 언제나 늘어가는 자신의 재산을 파악하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렇게 그날도 그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이 날 사채업자는 자신의 재산이 반토막이 되어버린 것을 알게 되었다. 사채업자에게 최악의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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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어떤 실수가 있는게 아닐까 생각하였다. 자신이 술에 취했던 날에 저질러버린 것이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렇게 술에 곯아떨어진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아무리 자신이 실수를 했다한들 난생 처음보는 이름들로 빼곡히 채워진 장부의 존재는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심지어 꽤 오래전부터 적히고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름들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혹시 다른 사람의 장부랑 바뀐 것인가 하고 생각해보지만 애초에 마을에 다른 사채업자도 없고, 장부 자체는 자신의 장부가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 이름들은 무엇인가? 자신의 필체로 적힌 것이 분명한 이 기록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답은 하나였다. 사채업자는 자신이 치매에 걸렸음을 확신했다. 그것이 아니어도 분명 기억력에 손상이 온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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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자마자 사채업자는 장부를 들고 장부에 적힌 한 사람의 집으로 향했다. 르미에라고 적혀있는 이 사람은 꽤나 거래량이 많았던데다가, 마지막으로 빌려준 금액 역시 적지 않은 편이었다. 돈을 빌려줄때는 사는 곳을 비롯하여 여러 정보를 기입해두었기에 그가 사는 집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사채업자는 주소로 적혀있는 집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그 집은 아무도 살지 않는 것마냥 굳게 닫혀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나오는 이가 없었다. 한참을 집 앞에서 서성였지만 그 누구도 집에 다가서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옆집에 사는 이에게 물어보았으나 오래 전부터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었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르미에의 정보에 성이라고 적혀 있는 글자도 있었으나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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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망한 사채업자는 다른 사람을 찾았다. 미세스 팟이라는 여성 고객이었다. 거래 금액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월말이 월급날인지, 항상 꼬박꼬박 월말에 착실하게 대금을 갚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남편의 술값"이라는 항목으로 여러번 거래된 것으로 보아 함께 사는 가족도 있는게 틀림없었다. 팟의 집에 도착하여 문을 두들겼으나 역시나 정적만이 흘렀다. '여기도?' 라는 불안감이 사채업자의 마음을 덮으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에이씨, 빌린 돈도 없는데 뭐야?"

집에서 나온 사람을 보고 사채업자는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에게 여러번 돈을 빌렸던 주정뱅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이 확실하다면 그는 혼자 사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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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미세스 팟 이라고 아나?"

"뭐? 그런 사람을 왜 여기와서 찾어!?"

"여기 자네 혼자 사는 거 맞지?"

"그럼 내 집에 나 혼자 살지 뭐야?"

사채업자는 아연실색할 뿐이었다. 장부에는 있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 다들 가짜 주소를 적은 것일까? 이후로도 사채업자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장부에 적힌 이들에 대해서 물었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 이들이었다. 유령과도 같았다. 자신이 귀신에 홀린 것인지, 아니면 상상속의 인물들에게 돈을 빌려준 것일까? 그들에게 빌려준 돈은 어떻게 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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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업자는 집에 돌아와 다시 장부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이 유령같은 사람들의 리스트를 작성해보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성"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실제로 성이라고 적히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성이라고 적혀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성" 이것이 핵심이라고 확신하였다. 하지만 대체 이 성은 무엇인가?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는 성이 하나도 없었다. 주변에 다른 마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성을 연상시킬만한 곳이 마을에 있지도 않았다. 어떤 비유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자신이 장부에 그런 것을 적을리 만무하였다. 성은 말 그대로 성이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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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이 일을 알게 된 이후로 많은 시간동안 조사해보았지만 이상함만 더해갈 뿐, 아무런 해결의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사채업자는 점점 지쳐갔고, 처음 1년이 지났을 무렵엔 마음속에서 돈을 회수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하지만 한달에 한번 정도는, 나중에 그 돈들을 회수할 때 얼마나 많은 돈을 받을지에 대한 행복한 꿈을 꾸었다. 무의미한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재산을 잃은 슬픔을 그런 식으로 달래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정신에 병이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조사를 하면 할수록 이상한 점들이 많음을 알게되었다. 정말 마법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마녀의 농간인 것일까? 사채업자의 마음은 그렇게 병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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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일들이 있었기에 사채업자는 지금 모리스가 말하는 것들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모리스가 말하는 야수라든가 마법의 가구들, 특히 숲속에 숨겨져 있는 거대한 성에 대해 들었을 때는 신의 계시와 같이 느껴졌다. '저기다. 저 곳에 가야한다.' 사채업자는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마을 사람 그 누구도 모리스의 말을 믿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모리스를 두둔했다가는 자신도 저 마차에 실려 정신병원에 실려갈 판이었다. 사채업자로서는 인생 마지막 기회처럼 여겨졌지만 어찌할 방도가 생각나질 않았다. 하다못해 성의 위치라도 들었으면 했다. 그때였다.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입은 벨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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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이 나타나고, 마법의 거울로 야수의 모습을 보여주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마법의 존재를 믿지 않던 사람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무기를 들고 성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무기를 든채 개스톤을 따라 숲속으로 걸어갔다. 사채업자 역시 그 무리에 합류하였다. 어쩌면 자신의 잃은 재산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가슴 속에 벅차올랐다. 없어진 사람들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왠지 다들 작당하여 자신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숨어있는 것만 같았다. 횃불을 든 손에 힘이 꽉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겨울의 숲은 추웠지만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행진하는 탓인지, 아니면 가슴에 이글거리는 분노 때문인지 땀마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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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숲길을 지나 사채업자와 마을 사람들은 드디어 그 성에 도착하였다. 밤이라 어두웠지만 장미가 핀 정원이 무척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둠이 깔린 성은 음침하고 어딘가 무서워보였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그런것은 개의치 않았다. 당장 저 성 문을 부수고 야수를 없애야한다는 정의감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사채업자의 심장은 점점 더 크게 고동치기 시작하였다.

거칠 것이 없는 마을 사람들이 정문을 열고 들어섰지만 성은 고요했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떠한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사채업자를 비롯한 마을사람들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어쩐지 그리운듯한, 처음 보는 성인데 낯설지 않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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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

어떤 여성의 외침이 들려오고 갑자기 아수라장이 되었다. 촛대와 시계, 찻잔과 소파부터 옷장까지, 온갖 종류의 가구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가구들이 사람들을 뭉개버리는가 하면, 촛대가 사람들의 옷에 마구 불을 붙이고 다녔다. 접시들이 날아와 사람들의 머리를 때리고, 작은 의자들이 사람들의 발을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사람들도 마법의 가구들의 공격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였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도 하였고, 사람이 아닌 존재와 싸우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사채업자도 작은 시계 하나를 처리하지 못해 끌려다니고 있었다. 사채업자를 노려보던 시계가 갑자기 그 뒤를 향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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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미에! 조심하게!"

르미에..? 사채업자는 분명히 기억하였다. 자신이 처음 찾아간 고객. 거액의 돈을 빌려간 바로 그 르미에. 시계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보았더니 한 남자가 촛대의 뒤로 다가서서 공격하려는 찰나였다. 사채업자는 본능적으로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저 촛대가 그 르미에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고 강한 확신이 들었다. 사채업자는 남자에게 달려들어 함께 뒹굴어나자빠졌다. 머리와 무릎, 몸 여기저기를 부딪히고 강한 고통이 들었지만 그 이상으로 충만한 기쁨이 사채업자의 얼굴에 피어올랐다. 자신을 덮친 사채업자가 누워서 웃고 있자 그 남자는 사채업자에게 '에이 미친 새끼'라고 욕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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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가구들의 승리로 거의 끝나가는 것마냥 보였다. 사채업자는 쫓겨나지 않기 위해 몰래 성 안 쪽으로 숨어들었다. 다행히도 사채업자가 숨어있던 곳에는 그 성질 나쁜 가구들이 없어보였다. 만약 아까 그 촛대가 르미에라면, 마찬가지로 미세스 팟도 여기에 있을 것이고, 다른 채무자들도 모두 이 성에 있으리라 확신했다. 마법에 걸려 가구로 변해 있더라도 어떻게해서든 돈을 받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혹시나 이 저주가 야수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지만 그것은 중요한게 아니었다. 어찌됐든 저들이 사채업자의 돈을 갚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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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모두 쫓겨나고 가구들이 승리의 환호를 하고 있을 무렵, 갑자기 어디선가 총성이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다른 총성이 들리고 야수의 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사채업자는 개스톤이 야수를 쓰러뜨린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저 멀리 있던 가구들이 갑자기 멈추기 시작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하나 둘 서서히 마법의 가구에서 그냥 가구로 돌아갔다. 사채업자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냥 가구를 상대로 어떻게 돈을 받아낸단 말인가. 하다못해 저 르미에게서라도 돈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도 잠시, 르미에 마저 그냥 촛대가 되어버렸다. 사채업자는 눈 앞에서 꺼진 희망에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야 모든 걸 알았는데' 라고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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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였다. 갑자기 어둠이 깔린 성에 강한 빛이 내려쬐기 시작했다. 성 곳곳에 마법의 빛이 퍼져나갔다. 따스함과 행복이 느껴지는 빛이 사채업자의 뺨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리고 사채업자의 눈 앞에 놀라운 마법같은 일이 일어났다. 가구들이 차례대로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으로 되돌아간 가구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놀라는 것도 잠시, 서로를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법이 풀린 것이다. 즐거움과 환희가 성 안에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도망쳤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씩 성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였고 함께 껴안고 울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모든 기억이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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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업자의 기억도 마침내 모두 회복되었다. 그 르미에는 자신의 돈을 자주 빌려가던 그 밉살맞은 르미에가 맞았다. 항상 남편의 술값 때문에 근심어린 표정으로 돈을 빌리러 오던 미세스팟도 기억이 났다. 장부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돌아왔다. 기쁨에 겨운 모두를 바라보며 사채업자도 덩달아 행복함에 눈물이 났다.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사채업자도 기쁨에 겨워 한사람 한사람 꼬옥 안아주었다. 아무도 모르겠지. 사채업자가 안을 때마다 속으로 열심히 자신이 받을 이자를 계산하고 있다는 걸.

'난 이제 부자다!'

사채업자는 매우 행복하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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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번째 이야기,

알라딘 편

_어느 경비병의 이야기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사막 위의 왕국 아그라바.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번화가의 경비초소를 지키는 카심은 오늘도 분주하다.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빈민촌의 아이들이 오늘도 어김없이 소동을 일으켰다. 성실하게 납세를 하는 시민들과는 달리 남의 것만 탐하는 저 거렁뱅이들을 볼 때마다 카심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쉰다. 일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의 것만 탐내는 저 놈들은 정말 이 아그라바에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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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썽쟁이 꼬마 무리들에게 항상 당하고 사는 사과가게 주인은 카심을 볼 때마다 하소연이다. 저 녀석들은 아무리 혼쭐을 내주고 감옥에 보내버려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저런 못된 짓을 일삼고 다닌다. 특히 저 소년 무리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알라딘이라는 녀석은 정말 골칫거리다. 평소에는 조용한 경비대장도 저 녀석을 볼 때마다 고함을 내지른다. 번번이 저 알라딘 녀석을 놓치고 쌓이는 스트레스를 카심과 동료들에게 풀어 제낀다. 저 알라딘 놈 때문에 시장이 아수라장이라도 되는 날에는 끔찍하다. 알라딘의 존재 그 자체가 카심에게는 크나큰 불행과 불안이다. 알라딘을 없애버릴 수만 있다면 하는 상상을 카심이 얼마나 많이 했는 지 모른다. 알라딘은 정말이지 아그라바의 큰 골칫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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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심은 알라딘에게 배후의 조직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누군가의 도움도 없이 그렇게 항상 경비병들을 따돌리는 도주해내는 능력은 말이 안된다. 게다가 항상 행색은 거지차림인데 저 녀석이 털어가는 양을 생각하면 그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어딘가의 조직에게 자신이 챙긴 전리품을 항상 바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카심에게 있어 알라딘은 정말 비열한 녀석이지만, 알라딘을 잡는 것 보다 그 배후의 조직을 잡는 것이 아그라바에 도움이 될꺼라 생각하였다. 자신의 구역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닐때엔, 카심은 멀리서 알라딘을 지켜보곤 하였지만, 배후 조직의 꼬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몸이 굼뜬 카심에게 있어 알라딘의 움직임은 정말 신출귀몰 그 자체였다. 알라딘은 정말 짜증나는 골칫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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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항상 기회만 노리던 카심에게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알라딘이 왕궁의 지하 감옥에 투옥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아그라바의 큰 골칫거리인 녀석이 잡혔다는 건 꽤나 화제거리가 되었다. 카심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분명 알라딘 배후의 조직이 알라딘을 구출하러 올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조직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고 있기에 아무도 그런 대책을 세우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카심은 생각하였다. 카심을 제외하고는 다들 알라딘을 그냥 거렁뱅이라고만 생각할 뿐이었으니 말이다. 카심은 알라딘이 갇혀있는 지하 감옥 안에서 잠복을 하고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조직이 나타나기만을 빌며, 추운 지하감옥에 숨어 알라딘을 쭈욱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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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을까. 저 알라딘 녀석은 함께 다니는 원숭이 자식과 시종일관 떠들고 있다. 키심은 말도 못하는 원숭이랑 쉬지 않고 대화하는 알라딘을 보며 어딘가 나사빠진 놈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겨운 이야기들이 마치 메아리 치듯 카심의 귀에 내려 앉았다. 지겨운 잠복을 하는 와중에도 카심은 조직에 대해 생각하였다. 조직은 얼마나 클지, 어떤 사람들이 있을지, 과연 우두머리는 누구일지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는 카심에게 알라딘의 목소리는 마치 잔잔한 음악처럼 울려 퍼졌다. 그런 생각도 잠시, 카심은 그 목소리가 어느샌가 두개로 변해 있음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알라딘과 그 주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카심은 이내 어둠속에 가리워진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았다. 누추한 거렁뱅이 같은 모습을 한 백발의 노인네가 알라딘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있었다. 행색만 보면 영락없이 감옥에 수감되있을 법한 거지같은 몰골이었지만 그것 또한 조직의 위장일지 모른다 생각한 카심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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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알라딘은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더니 불현듯 노인의 손에서 붉은 빛을 내는 보석이 나타났다. 어두운 감옥안에서 희미한 달빛만으로도 매우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이었다. 노인은 알라딘에게 보석을 보여주더니 이내 비밀 통로를 열었다. 카심은 속으로 환호했다. 역시 자신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생각하였다. 왕궁의 지하 감옥에 저런 비밀 통로를 만들 정도라는 생각이 들자 카심은 살짝 소름이 돋았다. 조직의 존재와 그 힘에 대해 알게 되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알라딘만 상대할 때는 왠지 여유롭게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였지만, 조직의 힘을 직접 보고 나니 긴장되어 등에 땀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카심은 자신을 이렇게 긴장되게 만드는 알라딘이 정말 골칫거리라고 생각하며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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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알라딘이 비밀통로로 나간 후 잠시 기다렸다가 카심도 통로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좁고 긴 통로는 성문 바깥의 한 폐허로 연결되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노인의 발걸음이 늦어서인지 카심은 금새 그들을 찾을 수 있었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카심은 최대한 몸을 숨겨 그들을 미행하였다. 카심은 그들이 조직의 본거지로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런 사막에 비밀 기지를 만들 정도라면 얼마나 큰 조직일까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어쩌면 아그라바를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거나, 혹은 아그라바를 뒤에서 조종하는 거대한 조직이 아닐까? 뭐가 됐든 경비병인 자신에게는 파헤치고 무너뜨릴 대상이다. 카심은 아그라바를 이 위기로부터 구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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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과 노인이 가던 길을 멈추더니 갑자기 모래가 출렁이며 빛을 내기 시작하였다. 그것도 잠시, 모래로 만들어진 거대한 야수의 얼굴이 나타났다. 카심은 무시무시한 마법을 목격하자마자 소리를 지를 뻔 하였다. 수십년의 인생을 살면서 소소하게 마술을 부리는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이정도로 거대하고 강력한 마법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마 왕궁의 마법사님도 이정도의 마법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카심은 생각하였다. 걱정도 잠시, 그 거대한 야수와 알라딘이 대화를 하기 시작하였다. 카심은 알라딘 녀석이 담이 크다고는 생각했지만 저런 무시무시한 것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자 녀석이 미친게 틀림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움직이지도 못하는 자신을 아무도 보지 못하기를 기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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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야수가 입을 쩍 벌리더니 빛이 나는 통로가 열리고, 알라딘은 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있던 노인은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경계하고 있어 차마 카심은 다가갈 수 없었다. 카심은 저 야수가 마법으로 만들어진 문지기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조직의 사람들에게만 조직의 비밀 기지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저런 고급 마법을 사용하는 조직이라니, 아그라바의 위기 임에 틀림없다. 카심은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아그라바로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저 멀리 빛나는 아그라바의 불빛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몇번이고 넘어지면서도 카심은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 사막에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왠지 저 무서운 야수가 자신을 쫓아와 물어 뜯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쉼없이 달린 카심은 경비초소에 도착하여 숨을 고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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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보던 동료가 다가와 녹초가 된 카심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카심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도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못할 일들을 과연 동료가 이해해 줄 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조직의 강력한 힘을 본 카심은 쉽사리 다른 사람을 믿기 어려워졌다. 어쩌면 자신의 주변에도 조직의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졌다. 이 긴급한 위기 상황을 누구에게 말해야할지 고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경비대장에게 말해야 할까? 과연 경비대장이 자신의 말을 온전히 믿어줄 것인가? 적어도 알라딘이 탈출했다는 것은 증명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막에서 본 것은 어떻게 증명해낼 것인가? 카심은 후회했다. 그 무서운 곳에서 무언가 하나라도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을 챙길 생각도 안한 자신을 탓했다. 이래저래 알라딘 때문에 골칫거리 상황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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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심은 강력한 마법이 연루된 사건이니 직접 왕궁의 마법사에게 이 일을 보고해야 겠다고 생각하였다. 증거는 없지만 그의 능력으로 자신이 본 것을 어떻게든 증명해주지 않을까 생각하였다. 적어도 그 모래 야수를 만드는 마법보다는 그 쪽이 한참은 쉬워보였다. 이 일을 한시도 미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 카심은 왕궁으로 가기 위해 경비초소를 나섰다. 그런데 나서자마자 저 먼 골목 모퉁이에서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누더기 옷에 백발의 수염을 가진 노인, 알라딘과 함께 있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노인은 골목 안쪽으로 이내 쑥 사라져 버렸다. 카심은 바로 그 노인을 뒤 쫓기 시작하였다. 무서웠지만 경비병으로서의 책임을 느끼며 노인이 사라진 골목으로 내달렸다. 노인은 골목길을 따라 왕궁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심히 거리를 유지하며 카심은 노인을 뒤쫓았다. 노인은 별다른 경계없이 자신의 길을 쭈욱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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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었을까, 어느 새 카심과 노인은 왕궁의 벽을 따라 걷고 있었다. 높이 세워진 벽을 따라 좁은 길들을 계속 걸었다. 주로 대신들이 살고 있는 왕궁의 별채 쪽 벽이었다. 계속 쉬지 않고 걸어가던 노인은 갑자기 멈추더니 벽을 손으로 짚고 밀기 시작하였다. 큰 힘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지만 이내 벽이 밀리더니 마치 문처럼 열렸고, 노인은 그 안으로 쑥 들어갔다. 그 광경을 목격한 카심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강력한 마법 능력을 지닌 조직이 왕궁에까지 침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왕궁에서 거주하고 있는 귀빈들과 귀족들, 모두가 강력한 용의자가 되었다. 카심은 분명 그 노인이 왕궁 내의 조직원에게 가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어쩌면 그 자가 조직의 우두머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가장 위험한 적이 가장 중요한 곳에 있는 것이다. 카심은 당장 이것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왕국의 안위와 관련된 일이니만큼 폐하에게 직접 알려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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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심은 비밀 통로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정문으로 되돌아갔다. 왕을 만나려 하였지만 늦은 시간이었기에 불가하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일개 마을 경비병인 카심이 아무리 아그라바의 위기를 말해보았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마치 뱀과 같이 날카로운 눈으로 차갑게 카심을 노려보던 왕궁 경비병은 카심에게 대신을 만나서 말해보라 말하고 길을 열어주었다. 곁에 있던 경비병이 카심을 대신에게 인도해주었다. 자신을 노려보던 왕궁 경비병이 좀 섬뜩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카심은 그런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였다. 치열한 밤을 보내고 있어 자신이 예민해졌다고 생각하였다. 이윽고 카심은 대신의 방에 이르렀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자신의 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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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 전속 마법사인 그는 뱀과 같은 눈에 키가 크고, 피골이 상접하여 삐쩍 말랐으며 언제나 기분이 썩 좋지 않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게다가 가느다랗게 자라난 수염은 왠지 그를 사악한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하지만 카심은 인자한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대신에 대해 썩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늦은 시간에 자신을 찾아온 카심이 짜증이 난다는 듯 대신은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카심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어두운 밤중이었지만 대신은 평소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카심은 자신이 그의 잠을 깨운 건 아니라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고 대신에게 자신이 목격한 것을 보고하였다.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모든 것을 보고하였다. 왕국의 위기를 거듭 강조하며 카심은 당장 의심되는 자들을 불러 취조해야 한다고 대신을 설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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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모든 설명을 듣던 대신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함께 모으라 말하였다. 카심은 여기에 오기까지 조직에 대한 불안으로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고 말하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카심과 함께 온 경비병이 뱀으로 변하더니 카심을 옭아맸다. 커다란 뱀은 카심의 몸을 옥죄고 비명도 지르지 못하도록 입까지 막아버렸다.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당황한 카심은 발버둥쳤으나 상황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옥죄는 힘만 점점 강해졌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인지 카심은 머릿 속이 하얘졌다. 갑작스런 충격에 사람이 얼마나 당황하고 정신이 없어지는지 깨달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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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 별 하찭은 것이 달라붙었었군."

카심은 혀를 찬 대신이 자신을 조르고 있는 뱀에게 손짓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점점 강력한 힘이 자신을 옥죄어 오는 것을 느꼈다. 뼈가 바스러지는 강렬한 고통을 느끼며 점점 카심의 정신은 혼미해졌다. 아무리 빠져나가려 애를 써도 불가능하였다. 이제야 조직을 알았는데, 이제 모든 것을 알았는데... 폐하의 가장 가까운 곁에 있는 저 사악한 마법사, 자파가 바로 조직의 배후이거늘... 카심의 손은 힘을 잃고 쳐지기 시작하였다.

"오늘은 참 무얼해도 안되는 날이군. 일진이 더러운 날이야. 알라딘 놈 때문에 괜한 고생이군."

어쩐지 카심은 자파가 자기 속마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알라딘은 정말 짜증나는 골칫거리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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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의 차이

By Seongto

관점의 차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누군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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